CSTC 인사이트[중앙일본 지면] 오피니언: 이병훈의 마켓나우 (2024.05.28) 신뢰에서 나오는 속도가 R&D 강국의 조건


[이병훈의 마켓 나우] 신뢰에서 나오는 속도가 R&D 강국의 조건

 

신뢰에서 나오는 속도가 R&D 강국의 조건

중앙일보 입력 2024-05-28 0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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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R&D 분야에서 예비타당성 평가제도, 속칭 ‘예타’에 대한 존폐 논란이 다시 시작됐다. 한·미 양국 반도체 분야의 사례를 비교해보면 논란을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방책이 떠오를 수 있다.

2021년 1월 바이든 정부 출범에 맞춰,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반도체 10년 계획’이라는 150쪽 보고서를 발간했다. 같은 해 8월 반도체 분야에 527억 달러(약 72조56억 원)를 투자하는 계획이 수립됐다. 1년 후 이 계획은 ‘칩스법’으로 확정돼, 2035년을 목표연도로 하는 장기적인 연구계획이 수립됐다. 그후 지금까지 보조금 지급을 전제로 한 미국 내 반도체 제조업 활성화 계획이 실행되고 있다. ‘속도감’이 눈에 띈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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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2016년 차세대 반도체 소자 연구에 4000억원을 투자하자는 예타 기획이 시작됐다. 이후 예타 기획이 세 번 반복됐고,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소자 개발사업에 2400억원을 투자하기로 2020년에 결정됐다. 2016년에 제안된 기술에는 요즘 화제가 되는 이종집적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제안에서 투자 결정까지 5년이나 걸렸다. 경쟁국들보다 먼저 출발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수천 쪽이 넘는 예타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낭비한 셈이다. 게다가 어렵게 시작된 반도체 개발 사업도 당초의 도전적인 기획 내용을 따르기보다는 당장 필요한 기술들이나 국내 연구진들이 선호하는 주제로 변형되어 운영되고 있으니, ‘10년 후에 경쟁국을 압도하는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목표가 달성될지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물론 완벽한 기획은 없다. 미국은 신속한 의사결정이 장점이지만, 너무 서두르다 보니 계획 없이 방황하는 부분이 생긴다는 문제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R&D사업을 끝도 없이 검토하다가 투자의 적기를 놓친 셈이 됐다. 지나치게 엄밀한 계획으로 때를 놓치면, 계획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한·미 양국의 두 사례에서 발견되는 ‘속도 차’는 기술 리더십에 대한 신뢰수준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미국이 ‘반도체 10년 계획’을 바탕으로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산·학·연 관계자들의 집단지성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그 신뢰를 만든 배경에는 연구책임자에게 대형 국책 연구사업에 대한 모든 권한을 주고, 결과에 대해 냉정하게 책임지게 하는 연구관리 시스템이 있다.

예타 제도 개편에 대한 논의는 투자효율 검토나 철저한 사후관리와 같은 관리 위주의 사고방식보다는 연구 리더들의 판단과 연구자들의 집단지성을 신뢰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연구자들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예타 폐지는 불필요한 규제를 통해 또 다른 실패 사례를 만들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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