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보 서비스가 뒤따라 등장하고 이에 따라 소비자들의 생활양식이 바뀌면서 정보혁명은 진전돼 왔다. 반도체의 기술 진전이 이 모든 정보혁명의 동력인 셈이다.
◆ 산업구조 변화 이끄는 반도체 기술 발전
우리는 지난 50여 년간 3차례 큰 패러다임 변화를 경험했다. 1977년 열린 PC의 시대는 본격적인 정보혁명의 시작점이다. PC의 보급 확대는 인터넷 시대를 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2년께에는 디지털 시대가 열렸다. PC의 탄생 이후 무어의 법칙이 5번 반복돼 대략 1000배 정도 반도체의 성능이 향상됐고 이에 따라 모든 방송, 통신 신호의 디지털 처리가 가능해졌다. 이른바 전자산업의 디지털 기술혁명이다.
그 후 또 다른 15년이 지난 2007년에는 모바일 시대가 왔다. 고성능 컴퓨터와 통신기기, 카메라 등 기능이 하나의 스마트폰으로 집적되는 '모바일 컨버전스(융합)'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다시 14년이 지난 2021년 현재, 세계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5세대 이동통신(5G)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커머스, 뱅킹, 모빌리티, 에너지 등 전 산업, 특히 서비스 산업이 커다란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모두 반도체 기술의 진전이 가져온 변화다.
◆ 미국 중심의 세계 반도체 산업 지형
현재 세계 첨단 반도체 설계·제조 산업은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인텔 등 미국 기업들이 초기부터 개척한 컴퓨팅 시스템용 프로세서 산업을 주도하고 있고,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제조 생산) 산업은 대만이 산업의 탄생기부터 리드하고 있다. 일본과의 기술 경쟁에서 승리한 한국은 메모리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첨단 반도체 영역에서 기업들 간의 상호 경쟁은 치열하나 국가별 리더십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전망이다. 이 3국이 주도하는 산업 지형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과거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다가 기술혁신 경쟁에서 탈락한 일본과 유럽이 다시 부상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충분한 내수가 있어서 기술 격차만 줄이면 큰 지형 변동을 가져올 수 있지만 미·중 갈등으로 큰 차질을 빚고 있다. 미국이 반도체를 발명하고 키워온 과정에서 확립한 반도체 제조장비, 설계 소프트웨어 등 기반기술의 제공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 기반기술의 자립을 추진하고 있으나 경쟁력을 확보하기에는 긴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 한국의 반도체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1983년 삼성의 VLSI(초고밀도 집적회로) 메모리 사업 추진 선언이 한국 반도체 도전의 실질적인 시작이다.
당시에는 한국 수준에 좀 무리한 도전이라는 국내외 평가가 많았으나 결과적으로 이 도전은 철저하게 계획된 과감한 결단이었던 것으로 증명됐다. 당시에도 PC와 함께 D램 시장의 급성장을 예상할 수 있었고, 메모리 시장을 석권한 일본 기업들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는 글로벌 사업 환경이 우호적이었다. 그 위에 한국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도 강력했다. 무엇보다도 1960년대부터 추진된 이공계 정원 대폭 확대, 과학원 설립 등 인재 육성 정책으로 기술 인재의 풍부한 공급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주력 제품인 D램에 인재와 자본을 집중시킨 10년 후 삼성은 선제투자를 통해 매출 1위 기업으로 올라설 수 있었고 1995년께에는 기술 혁신에서도 앞서가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PC 수요로 1994~1995년 D램 산업은 대호황기를 맞게 됐는데 이 시장을 놓고 경쟁하던 세계적 D램 기업 12곳은 앞다퉈 생산라인을 확충했다. 이 과잉 투자는 1996년부터 D램 가격이 10분의 1로 추락하는 유례없는 D램 대공황을 불렀고, 1998년까지 계속된 이 대공황으로 수많은 D램 기업들이 퇴출된다. 삼성전자는 D램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에는 가격 폭락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으로 무장돼 있었기에 이 대공황을 적자 없이 극복한 유일한 기업이 됐다.
낸드플래시 메모리 분야는 삼성이 산업의 탄생 초기부터 참여하고 기술 혁신을 주도한 드문 사례다.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전자기기의 정보 저장용으로 시장이 성장했고, 훗날 스마트폰 확산으로 대형 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데이터 시대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은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의 50%를 점유하고 있다.
삼성이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해외 사업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께다. 인텔과 퀄컴, 엔비디아, TSMC, 소니 등 비메모리 반도체 강자들이 각 분야의 리더십을 굳혀가고 있는 상황에서 후발 주자 삼성에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다만 메모리기술과의 시너지, 삼성전자의 통신·가전·디스플레이 사업과의 시너지, 그리고 다가오는 모바일 시대가 열어주는 새로운 기회를 기대할 수 있었다.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결정한 삼성은 국내외 인재 확보에 나섰고, 2003년 비메모리 전용 라인을 건설해 첨단 파운드리 사업의 기반을 확보했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삼성은 파운드리와 이미지센서 분야에서 세계 2위권 위치를 확보했다.
특히 파운드리 산업은 반도체 산업에서 현재 가장 격렬한 전장으로 꼽히는 분야다. 첨단 반도체의 제조 서비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수요가 급증하는 산업일 뿐만 아니라 비메모리 산업의 기반으로서 전략적 가치가 크다. 그러나 기술적 장벽이 높아 새로운 기업의 진입이 극히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고객 사업의 명운이 걸린 핵심 칩의 제조를 수탁하는 만큼 고객의 신뢰 확보 여부가 이 사업의 승패를 결정한다. 메모리 칩 같은 범용제품의 거래와는 차원이 다른 고객과의 운명공동체 의식이 필요하고 이에 맞는 기업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현재 대만 TSMC와 최첨단 파운드리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은 삼성이 유일하다. 미국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선언했으나 이미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에서 실패한 바 있어 성공적인 진입은 불투명하다. 세계의 모든 첨단 시스템 반도체 칩을 TSMC 단일 기업에 의존하는 상황은 각국의 정부나 기업들이 원하지 않는다.
◆ 한국에 반도체 산업이 특별한 이유
수십 년간 경쟁으로 형성된 반도체 산업의 영역별 리더십은 점점 굳어져가고 있다. 플래시 메모리를 마지막으로 새로운 제품 영역의 탄생은 없고 그 영역 안에서 기술 혁신 경쟁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업의 진입은 어려워진다. 그래도 전체 반도체 시장은 4차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지속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급증하는 데이터의 저장과 처리, 인공지능의 고도화는 더 큰 반도체 수요를 창출한다. 따라서 반도체 산업은 경쟁이 제한된 상황에서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이 산업 리더들에게는 보기 드물게 유망한 산업인 것이다.
또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먹거리 문제를 뛰어넘은 전략적인 가치를 가진 산업이다. 글로벌 필수재인 반도체 산업에서 '대체 불가능한 역량'의 확보는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국가의 안보와 존재감까지 연결된다. 대만의 파운드리가 좋은 예다. 대만의 선택은 미·중 기술 갈등의 큰 분기점이 됐다. 한국의 메모리 산업도 한국 위상을 크게 높여주고 있다.
유럽과 일본은 2차 산업혁명기에 산업국으로 도약하고 그 시기에 얻은 화학, 제약, 자동차, 항공, 정밀기계 등의 산업을 통해 선진 산업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반도체 산업은 한국의 산업화 시기와 3차 산업혁명기가 일치해 한국에 주어진 역사의 선물이다. 이 산업들의 원천적 혁신과 지배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연계된 신사업 영역을 적극 개척해 한국 경제의 확고한 기둥으로 키우고 지켜야 한다.
◆ 대체 불가능한 원천기술 확보하려면
한국은 이미 메모리·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이 가능한 상황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반도체 소재, 장비 산업에서도 교두보를 확보했다. 현재 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은 인재 공급 부족이다. 반도체 산업은 디스플레이 산업을 창출했고 파생된 나노기술은 2차전지뿐만 아니라 소재 산업 전반에 큰 혁신을 가져오고 있다. 첨단 클린 제조기술은 바이오위탁생산(CMO) 산업의 탄생에도 기여했다. 앞으로도 반도체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신사업이 탄생될 것이다. 이를 주도할 더 많은 반도체와 나노기술 관련 인재가 필요하다. 공학뿐만 아니라 원천적 발명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도 늘려야 한다. 한국의 대학·기업에 첨단 반도체 기술에 대한 지식이 축적된 만큼 '대체 불가능한 원천기술'의 발명 가능성도 높다.
최근 플랫폼 산업의 성장이 반도체 인재 공급에 위협 요소가 되지 않도록 하는 선제적 정책이 필요하다. 과거 상경계가 주도하던 커머스, 뱅킹 등의 서비스 산업들이 기술 산업으로 바뀌고 이공계 인재를 흡수하고 있다. 상경계를 포함한 플랫폼 산업의 인재 공급 확대 정책이 시급하다. 지난해 KAIST 2년 차 진학 학생들의 전공 선택에서 절반의 학생들이 전산학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과도한 플랫폼 기업 선호 현상이 첨단기술, 제조 산업의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런 현상을 경험한 미국의 예에서 충분히 예견될 수 있다.
반도체 기업들도 더 적극적으로 인재 확보에 투자해야 한다. 대학의 인재 공급이 원활해지도록 반도체 계약학과 설치나 전공 교수 확대에 기업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반도체 기술직 직업으로서의 경쟁력을 높여 나가야 한다. 조직문화, 보상에서 경쟁력이 있어야 지속적으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다.
새로운 세계적 반도체 기업의 탄생도 절실하다. 메이저 반도체 산업에서 글로벌 리더들은 모두 대형 기업들이다. 기술 인재들이 일정 규모 이상 모여야 경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벤처기업이 좁은 한국 시장을 바탕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확률도 높지 않고 또 긴 시간이 소요된다.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세계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국가대표급 기업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더 나은 기업에 자본과 인력이 집중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혁신 기술을 창출하는 벤처정신을 고양하고 이를 제대로 보상해야 한다. 주식시장이 활성화되고 스톡옵션 등 보상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기업이 끌고 정부가 밀어주는 경제성장의 기본 체제도 다시 정비돼야 한다. 삼성의 성공은 유능한 경영진을 등용하고 경쟁력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어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기업들이 인재를 육성하고 경쟁력을 올려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지원해야 할 때이다.
[임형규 前 SK텔레콤 부회장·前 삼성전자 CTO 겸 사장·매경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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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반도체, 최고인재가 안가는 순간…일본 전철 밟는다 [Big Picture]
이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보 서비스가 뒤따라 등장하고 이에 따라 소비자들의 생활양식이 바뀌면서 정보혁명은 진전돼 왔다. 반도체의 기술 진전이 이 모든 정보혁명의 동력인 셈이다.
우리는 지난 50여 년간 3차례 큰 패러다임 변화를 경험했다. 1977년 열린 PC의 시대는 본격적인 정보혁명의 시작점이다. PC의 보급 확대는 인터넷 시대를 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2년께에는 디지털 시대가 열렸다. PC의 탄생 이후 무어의 법칙이 5번 반복돼 대략 1000배 정도 반도체의 성능이 향상됐고 이에 따라 모든 방송, 통신 신호의 디지털 처리가 가능해졌다. 이른바 전자산업의 디지털 기술혁명이다.
그 후 또 다른 15년이 지난 2007년에는 모바일 시대가 왔다. 고성능 컴퓨터와 통신기기, 카메라 등 기능이 하나의 스마트폰으로 집적되는 '모바일 컨버전스(융합)'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다시 14년이 지난 2021년 현재, 세계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5세대 이동통신(5G)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커머스, 뱅킹, 모빌리티, 에너지 등 전 산업, 특히 서비스 산업이 커다란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모두 반도체 기술의 진전이 가져온 변화다.
현재 세계 첨단 반도체 설계·제조 산업은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인텔 등 미국 기업들이 초기부터 개척한 컴퓨팅 시스템용 프로세서 산업을 주도하고 있고,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제조 생산) 산업은 대만이 산업의 탄생기부터 리드하고 있다. 일본과의 기술 경쟁에서 승리한 한국은 메모리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첨단 반도체 영역에서 기업들 간의 상호 경쟁은 치열하나 국가별 리더십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전망이다. 이 3국이 주도하는 산업 지형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과거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다가 기술혁신 경쟁에서 탈락한 일본과 유럽이 다시 부상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충분한 내수가 있어서 기술 격차만 줄이면 큰 지형 변동을 가져올 수 있지만 미·중 갈등으로 큰 차질을 빚고 있다. 미국이 반도체를 발명하고 키워온 과정에서 확립한 반도체 제조장비, 설계 소프트웨어 등 기반기술의 제공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 기반기술의 자립을 추진하고 있으나 경쟁력을 확보하기에는 긴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1983년 삼성의 VLSI(초고밀도 집적회로) 메모리 사업 추진 선언이 한국 반도체 도전의 실질적인 시작이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PC 수요로 1994~1995년 D램 산업은 대호황기를 맞게 됐는데 이 시장을 놓고 경쟁하던 세계적 D램 기업 12곳은 앞다퉈 생산라인을 확충했다. 이 과잉 투자는 1996년부터 D램 가격이 10분의 1로 추락하는 유례없는 D램 대공황을 불렀고, 1998년까지 계속된 이 대공황으로 수많은 D램 기업들이 퇴출된다. 삼성전자는 D램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에는 가격 폭락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으로 무장돼 있었기에 이 대공황을 적자 없이 극복한 유일한 기업이 됐다.
낸드플래시 메모리 분야는 삼성이 산업의 탄생 초기부터 참여하고 기술 혁신을 주도한 드문 사례다.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전자기기의 정보 저장용으로 시장이 성장했고, 훗날 스마트폰 확산으로 대형 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데이터 시대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은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의 50%를 점유하고 있다.
삼성이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해외 사업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께다. 인텔과 퀄컴, 엔비디아, TSMC, 소니 등 비메모리 반도체 강자들이 각 분야의 리더십을 굳혀가고 있는 상황에서 후발 주자 삼성에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다만 메모리기술과의 시너지, 삼성전자의 통신·가전·디스플레이 사업과의 시너지, 그리고 다가오는 모바일 시대가 열어주는 새로운 기회를 기대할 수 있었다.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결정한 삼성은 국내외 인재 확보에 나섰고, 2003년 비메모리 전용 라인을 건설해 첨단 파운드리 사업의 기반을 확보했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삼성은 파운드리와 이미지센서 분야에서 세계 2위권 위치를 확보했다.
현재 대만 TSMC와 최첨단 파운드리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은 삼성이 유일하다. 미국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선언했으나 이미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에서 실패한 바 있어 성공적인 진입은 불투명하다. 세계의 모든 첨단 시스템 반도체 칩을 TSMC 단일 기업에 의존하는 상황은 각국의 정부나 기업들이 원하지 않는다.
수십 년간 경쟁으로 형성된 반도체 산업의 영역별 리더십은 점점 굳어져가고 있다. 플래시 메모리를 마지막으로 새로운 제품 영역의 탄생은 없고 그 영역 안에서 기술 혁신 경쟁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업의 진입은 어려워진다. 그래도 전체 반도체 시장은 4차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지속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급증하는 데이터의 저장과 처리, 인공지능의 고도화는 더 큰 반도체 수요를 창출한다. 따라서 반도체 산업은 경쟁이 제한된 상황에서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이 산업 리더들에게는 보기 드물게 유망한 산업인 것이다.
또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먹거리 문제를 뛰어넘은 전략적인 가치를 가진 산업이다. 글로벌 필수재인 반도체 산업에서 '대체 불가능한 역량'의 확보는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국가의 안보와 존재감까지 연결된다. 대만의 파운드리가 좋은 예다. 대만의 선택은 미·중 기술 갈등의 큰 분기점이 됐다. 한국의 메모리 산업도 한국 위상을 크게 높여주고 있다.
유럽과 일본은 2차 산업혁명기에 산업국으로 도약하고 그 시기에 얻은 화학, 제약, 자동차, 항공, 정밀기계 등의 산업을 통해 선진 산업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반도체 산업은 한국의 산업화 시기와 3차 산업혁명기가 일치해 한국에 주어진 역사의 선물이다. 이 산업들의 원천적 혁신과 지배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연계된 신사업 영역을 적극 개척해 한국 경제의 확고한 기둥으로 키우고 지켜야 한다.
한국은 이미 메모리·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이 가능한 상황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반도체 소재, 장비 산업에서도 교두보를 확보했다. 현재 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은 인재 공급 부족이다. 반도체 산업은 디스플레이 산업을 창출했고 파생된 나노기술은 2차전지뿐만 아니라 소재 산업 전반에 큰 혁신을 가져오고 있다. 첨단 클린 제조기술은 바이오위탁생산(CMO) 산업의 탄생에도 기여했다. 앞으로도 반도체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신사업이 탄생될 것이다. 이를 주도할 더 많은 반도체와 나노기술 관련 인재가 필요하다. 공학뿐만 아니라 원천적 발명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도 늘려야 한다. 한국의 대학·기업에 첨단 반도체 기술에 대한 지식이 축적된 만큼 '대체 불가능한 원천기술'의 발명 가능성도 높다.
최근 플랫폼 산업의 성장이 반도체 인재 공급에 위협 요소가 되지 않도록 하는 선제적 정책이 필요하다. 과거 상경계가 주도하던 커머스, 뱅킹 등의 서비스 산업들이 기술 산업으로 바뀌고 이공계 인재를 흡수하고 있다. 상경계를 포함한 플랫폼 산업의 인재 공급 확대 정책이 시급하다. 지난해 KAIST 2년 차 진학 학생들의 전공 선택에서 절반의 학생들이 전산학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과도한 플랫폼 기업 선호 현상이 첨단기술, 제조 산업의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런 현상을 경험한 미국의 예에서 충분히 예견될 수 있다.
반도체 기업들도 더 적극적으로 인재 확보에 투자해야 한다. 대학의 인재 공급이 원활해지도록 반도체 계약학과 설치나 전공 교수 확대에 기업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반도체 기술직 직업으로서의 경쟁력을 높여 나가야 한다. 조직문화, 보상에서 경쟁력이 있어야 지속적으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다.
새로운 세계적 반도체 기업의 탄생도 절실하다. 메이저 반도체 산업에서 글로벌 리더들은 모두 대형 기업들이다. 기술 인재들이 일정 규모 이상 모여야 경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벤처기업이 좁은 한국 시장을 바탕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확률도 높지 않고 또 긴 시간이 소요된다.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세계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국가대표급 기업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더 나은 기업에 자본과 인력이 집중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혁신 기술을 창출하는 벤처정신을 고양하고 이를 제대로 보상해야 한다. 주식시장이 활성화되고 스톡옵션 등 보상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기업이 끌고 정부가 밀어주는 경제성장의 기본 체제도 다시 정비돼야 한다. 삼성의 성공은 유능한 경영진을 등용하고 경쟁력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어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기업들이 인재를 육성하고 경쟁력을 올려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지원해야 할 때이다.
[임형규 前 SK텔레콤 부회장·前 삼성전자 CTO 겸 사장·매경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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