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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식탁] 반도체, 용인은 지키고 지방은 키우려면
피렌체의 식탁
입력 2026-04-30 08:15:00
- 긴박한 글로벌 경쟁 상황, 용인은 계획대로 가야
- 반도체는 적기 투자, 대규모 투자가 생명
- 과실의 수도권 집중은 해결 필요, 정주 여건 개선해 지방 이전
- 용인은 지키고, 새 거점을 키워낼 때
‘베스트 셀러가 되면 저자와 출판사가 인세 분쟁을 벌이는 일이 많고, 책이 안 팔리면 싸울 일도 없다’라는 것이 출판계의 속설 같은 관행이다. 반도체가 그렇다. 종업원과 주주 간 입장 차가 두드러지고, 정부는 반도체가 지역 균형 발전의 마중물이 되길 기대하고, 사업주는 산업의 인위적 분산배치를 우려하고 있다.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인 이병훈 필자는 현 업계의 자구책을 중심으로 용인 지키기에 힘을 실으면서도 지방 이전을 놓치지 않고 있다. 전력반도체, 통신 반도체, 우주 국방 반도체, 초고성능 센서 등을 새로운 역점 분야를 ‘남쪽’에 우선 배치하자고 한다.
지금은 정부와 산업의 지도자들 간 많은 대화가 필요한 시점 같다. 몇몇 대통령과 창업 회장 등 국가와 산업의 파운더들(founders) 눈높이에서도 고민해 볼 때이다. [편집자 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 현장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최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에너지 수급과 수자원 확보의 한계를 근거 삼아, 지금의 입지 선정이 잘못되었고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해서라도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방으로 분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반면 반도체 클러스터의 분산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비효율을 초래하며, 결국 산업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 더해, 기존 논의와 지방선거 국면과 맞물려 지역별 이해관계까지 겹치고 있다. 국가 전략 산업의 미래를 둘러싼 논의가 냉정한 산업 전략보다 정치적 구호에 끌려가는 양상이 보인다.
‘국토 균형 발전’과 ‘반도체 산업 수성’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목표다. 다만 필자는 반도체 전문가로서, 긴박한 반도체 분야의 글로벌 경쟁 상황에 대한 인식을 이 논의에 더 엄밀히 반영할 필요가 있다 본다. 이 관점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이전과 분산은 국가 경쟁력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먼저 짚고 글을 시작하겠다. 용인 클러스터는 흔들림 없이 추진하되, 지역은 다른 방식으로 반도체 성장의 축을 세우는 ‘공존의 투 트랙 전략’이 필요하다.
반도체 산업, 국가 간 사활의 경쟁
세계 반도체 경쟁은 이미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경쟁이 되었다. 반도체 분야 경쟁국들은 ‘국가연합(대만-일본)’, ‘반도체 산업과 인공지능의 수직 계열화(미국)’, ‘지정학적 생태계 분리(미국 vs 중국)’ 등 다양하면서도 과감한 국가 차원의 전략을 통해 반도체 산업의 미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최근 AI의 수요 급증에 힘입어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일종의 ‘착시 효과’를 겪고 있다. 냉정히 글로벌 경쟁 구도를 살펴보면 한국의 메모리 분야는 여전히 경쟁국의 추격에 취약하고, 파운드리나 팹리스는 현재 한국이 겪는 ‘초호황의 후광’ 속에서 겨우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 단계일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미래에 대비하여 생산 기반을 서둘러 구축하고, 초격차 기술을 효율적으로 개발해야 할 결정적 시점이다.
집중의 중요성
단순히 팹을 짓고, 장비를 설치하는 것만으로 반도체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반도체 제조 시설을 국내로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 온갖 정책적 수단을 동원하고, 인텔과 같은 글로벌 강자가 ‘주 경기장’으로 돌아오기 위해 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아직 획기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소재, 부품, 장비가 원활하게 수급되고 소자 기업과 수백 개의 협력사가 상시 협력하는 유기적인 '제조 생태계'는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지배하는 메모리 중심의 산업 구조다. 제조 단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산업 클러스터의 ‘집중과 효율화’가 필수적인 환경인 것이다. 또한 반도체는 단 몇 달의 투자 지연이 곧 시장 주도권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 ‘적기 투자(Time-to-Market)’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업이다.
전 세계가 자국 산업에 대한 보조금과 파격적인 규제 인허가 속도전으로 경쟁력을 높이며, 그를 통해 우리나라를 압박하는 상황이다. 이럴 때 이미 검증된 인프라와 양질의 인력이 확보된 입지를 놔두고, 이를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는 주장은 국가 전략 산업의 미래를 건 위험한 선택이다. 당분간 용인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한 선택과 집중은 생존을 위한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팹을 짓고, 장비를 설치하는 것만으로 반도체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는 것은 아니다 // 사진=Unsplash
전력과 용수 문제,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용인 클러스터에 대한 우려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쟁점은 전력, 특히 친환경 에너지 수급과 용수 확보일 것이다. 10년 이후의 수요를 고려하면 용인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은 10~16GW로 예상된다. 당장 필요한 약 3GW 정도의 전력은 LNG 발전으로 대응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서 환경 오염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또 상당 부분의 전력은 송전망에 의존해 지방에서 끌어와야 하는데 주민이 그것을 수용할지 등을 고려하면서, 과연 가능하겠냐는 우려도 없지 않다.
이 부분은 기술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LNG 발전소가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보자. 발전소를 여기서 더 짓는 것에 대해 우려가 큰데, 따져 보면 수도권으로 전력을 공급하던 당진· 태안· 하동의 석탄 발전소를 LNG 발전소로 대체하는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탄소 배출량을 석탄 발전소의 45% 수준으로 낮추는 효과가 있다. 또한 수도권에 LNG 발전소를 지으면 송전선로 구축 부담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LNG 발전소를 짓는 것이 마냥 무리한 대안은 아니다. 참고로 서울 마포 한가운데에도 대규모 LNG 발전소가 자리 잡고 있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LNG 설비는 수소 혼소 발전(가스터빈에서 수소와 천연가스를 함께 태워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 수소 전소 발전(100% 수소로 발전하는 방식) 등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궁극적으로 무탄소 전원(CFE, Carbon Free Energy)으로 나아가기 위한 현실적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소형모듈원자로(SMR)와 같은 차세대 전력 기술의 상용화를 가속하는 방향으로 해법을 모색할 수도 있다. 이미 중국은 2026년 말 상용 SMR 가동이 가시권에 들어왔고, 미국 역시 ‘뉴스케일’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도 2030년대 초 상용화를 목표로 혁신형 소형원자로 (i-SMR)를 개발 중이다. 정부가 전력 수요 급증에 대비해 SMR을 포함한 차세대 원전 옵션을 제도적으로 열어둔 것이다.
이 발전소들을 2030년대 중반부터 경기 남부권에 배치할 수 있다면, 송전선로 확보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추면서 무탄소에 가까운 전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또 주민의 반대 때문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송전 문제는 서해안 초고압 직류송전 (HVDC) 등 기술적 발전을 통해 해법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가스공사 인천생산기지 LNG 저장탱크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이렇게 보면 용인 클러스터의 전력 문제는 사업을 멈춰야 할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미래 에너지 인프라 기술과 친환경 발전 기술의 개발을 가속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시급한 반도체 제조 기반 구축과, 미래 전력 수요 대응 기술 확보라는 목표를 동시에 만족하는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용수 역시 마찬가지다. 하수 재처리 등의 방법으로 2040년까지 용인 클러스터 수요(2040년 기준 약 76.4만 톤/일)의 두 배 가까운 146.9만 톤/일의 용수 확보 계획이 세워져 있다. 또한 반도체 업계에서도 반도체 팹에서 사용하는 용수의 재활용, 용수 저감 기술 등 신기술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용수 문제도 근본적인 제한 요인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산업은 기술의 압박이 클수록 더 빠르게 진화한다. 현재의 기술 수준만을 생각하며 10년, 20년 후의 문제를 예단해 국가 기간산업인 반도체 산업의 기반 구축을 지연시키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용인 클러스터를 미래 전력과 용수 기술의 실증 거점으로 삼는 방식이 훨씬 생산적이다.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이유로 전략 산업의 입지를 흔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제2의 ‘용인’ 아닌 제2의 ‘그르노블’
위에서 말했듯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고도로 집적된 산업생태계가 생명인 메모리와 최첨단 파운드리 제조에 집중되어 있다. 분산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반도체 클러스터 분산 주장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 전체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의 과실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프랑스 남부의 도시 ‘그르노블’이 좋은 사례다. 그르노블은 파리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나텍(MINATEC) 같은 세계적 연구소, 입자 가속기 등 거대 연구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지역 내 대학, 연구소, 기업이 연합해 운영하는 미나텍 연구소(MINATEC)는 연구원 3,000명, 학생 1,200명, 기업인 600명이 상주하고 있다. 거기에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SOITEC과 같은 반도체기업들이 어우러져 독보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밀집된 두뇌,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글로벌 강소기업,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연구, 생산 인프라, 강한 앵커 기업, 알프스가 보이는 우수한 정주 여건이 그르노블의 성공 요인이 되었다. 현재 그르노블은 반도체 패키징과 AI 반도체 분야에서 유럽 내 가장 핵심적인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르노블과 유사한 수준의 성공 요소를 어느 정도 갖춘 지역들이 없지 않다. 모든 지역마다 반도체 산업을 유치하겠다는 PIMFY (Please In My Front Yard) 현상을 극복하고 ‘가능한 지역’부터, 전략적 투자를 통해 지역 반도체 거점을 만들어 새로운 성장 기반으로 삼겠다고 생각하면, 지금과 사뭇 다른 발전 전략을 도출할 수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지금까지 메모리와 첨단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가 국가별 또는 진영별로 나뉘는 현 추세를 고려하면 생태계에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어 전력반도체, 통신 반도체, 우주 국방 반도체, 초고성능 센서도 유망한 분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런 분야들은 메모리와 같은 초고집적 생태계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따라서 지역을 이 부분을 담당하는 '다품종 고부가가치 기술 집적형 반도체 산업'의 요충지로 변모시키는 전략을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할 수 있다.
전국에 분산 설치되어 있는 반도체 연구인프라 시설도 연구용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확대 개편하고, 효율화하면 지방에서도 충분히 글로벌 강소기업이 탄생할 수 있다.

그르노블 시의 모습 // 사진=Unsplash
‘압도적’ 지방 정주 여건 제시해줘야
지역 반도체 전략에서 늘 제기되는 우려는 인재다. 지역에 인재가 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는 현상에 절반만을 보고 한 이야기다. 인재가 없어서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가 머물 수 있는 압도적인 환경을 먼저 제시하지 못한 것이 이유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포항공대가 성공적으로 지역에 정착할 수 있었던 비결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40년 전, 포항이라는 지방 도시가 세계적 연구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파격적인 정주 여건을 선제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 유치를 희망하는 지역이 글로벌 강소기업을 키워내고, 교육·의료·문화를 망라한 미래형 정주 여건을 제시할 수 있다면, 우수한 인재가 스스로 지방에 정착하며 혁신을 주도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정부는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글로벌 강소기업 창출 지원은 물론, 인재 육성과 고급 인력 지방 정주를 위한 특별 지원 등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획기적인 균형 발전 전략을 내놓아야 한다.
공존을 위한 실용적 투 트랙
결국 반도체 산업의 생존과 지역 균형 발전은 서로를 배척하는 대립의 가치가 아니다. ‘집중을 통한 초격차 사수’와 ‘전략적 분산을 통한 국가적 도약’은 선후(先後)를 다툴 문제가 아니라 함께 풀어내야 할 공존의 과제다.
우리 몸의 심장이 중심에서 강하게 박동하며 혈액을 공급하듯, 수도권의 반도체 클러스터는 반도체의 국제 경쟁력을 지탱하는 심장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 혁신의 에너지는 동맥을 타고 전국의 지역 거점으로 끊임없이 흘러가야 한다.
용인은 지키고 지방은 키워야 한다. 이미 수립된 용인 클러스터 계획은 SMR과 지능형 용수 순환 시스템 같은 혁신적인 자원 해법을 결합해 차질 없이 실행해야 한다. 동시에 정부는 제2, 제3의 그르노블을 만들기 위한 과감한 투자를 단행해야 한다. 지역 특화 반도체 거점 육성과 미래형 정주 여건 조성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 될 것이다.
기술의 진보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과 국가 정책이 강제해야 할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는 실용적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수도권과 지방이 각자의 전략적 역할을 맡아 하나의 유기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만이,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초격차를 지키고 국가 균형 발전의 백년대계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필자 이병훈은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학과장이다. 나노 융합 기술원 원장, 반도체 기술 융합센터(글로컬랩) 센터장을 겸임하면서 새로운 반도체 소재를 이용한 초저전력 반도체 기술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IBM, SEMATECH, SRC에서 차세대 로직 반도체 기술 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중장기 반도체 기술 개발 전략수립을 주도했다.
최근에는 반도체 인프라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지역혁신과 3+3집중 교육 프로그램과 같은 교육혁신에도 앞장서고 있다.
관련출처: https://www.firenzedt.com/news/articleView.html?idxno=32934
[피렌체의 식탁] 반도체, 용인은 지키고 지방은 키우려면
피렌체의 식탁
입력 2026-04-30 08:15:00
- 긴박한 글로벌 경쟁 상황, 용인은 계획대로 가야
- 반도체는 적기 투자, 대규모 투자가 생명
- 과실의 수도권 집중은 해결 필요, 정주 여건 개선해 지방 이전
- 용인은 지키고, 새 거점을 키워낼 때
‘베스트 셀러가 되면 저자와 출판사가 인세 분쟁을 벌이는 일이 많고, 책이 안 팔리면 싸울 일도 없다’라는 것이 출판계의 속설 같은 관행이다. 반도체가 그렇다. 종업원과 주주 간 입장 차가 두드러지고, 정부는 반도체가 지역 균형 발전의 마중물이 되길 기대하고, 사업주는 산업의 인위적 분산배치를 우려하고 있다.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인 이병훈 필자는 현 업계의 자구책을 중심으로 용인 지키기에 힘을 실으면서도 지방 이전을 놓치지 않고 있다. 전력반도체, 통신 반도체, 우주 국방 반도체, 초고성능 센서 등을 새로운 역점 분야를 ‘남쪽’에 우선 배치하자고 한다.
지금은 정부와 산업의 지도자들 간 많은 대화가 필요한 시점 같다. 몇몇 대통령과 창업 회장 등 국가와 산업의 파운더들(founders) 눈높이에서도 고민해 볼 때이다. [편집자 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 현장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최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에너지 수급과 수자원 확보의 한계를 근거 삼아, 지금의 입지 선정이 잘못되었고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해서라도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방으로 분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반면 반도체 클러스터의 분산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비효율을 초래하며, 결국 산업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 더해, 기존 논의와 지방선거 국면과 맞물려 지역별 이해관계까지 겹치고 있다. 국가 전략 산업의 미래를 둘러싼 논의가 냉정한 산업 전략보다 정치적 구호에 끌려가는 양상이 보인다.
‘국토 균형 발전’과 ‘반도체 산업 수성’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목표다. 다만 필자는 반도체 전문가로서, 긴박한 반도체 분야의 글로벌 경쟁 상황에 대한 인식을 이 논의에 더 엄밀히 반영할 필요가 있다 본다. 이 관점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이전과 분산은 국가 경쟁력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먼저 짚고 글을 시작하겠다. 용인 클러스터는 흔들림 없이 추진하되, 지역은 다른 방식으로 반도체 성장의 축을 세우는 ‘공존의 투 트랙 전략’이 필요하다.
반도체 산업, 국가 간 사활의 경쟁
세계 반도체 경쟁은 이미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경쟁이 되었다. 반도체 분야 경쟁국들은 ‘국가연합(대만-일본)’, ‘반도체 산업과 인공지능의 수직 계열화(미국)’, ‘지정학적 생태계 분리(미국 vs 중국)’ 등 다양하면서도 과감한 국가 차원의 전략을 통해 반도체 산업의 미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최근 AI의 수요 급증에 힘입어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일종의 ‘착시 효과’를 겪고 있다. 냉정히 글로벌 경쟁 구도를 살펴보면 한국의 메모리 분야는 여전히 경쟁국의 추격에 취약하고, 파운드리나 팹리스는 현재 한국이 겪는 ‘초호황의 후광’ 속에서 겨우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 단계일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미래에 대비하여 생산 기반을 서둘러 구축하고, 초격차 기술을 효율적으로 개발해야 할 결정적 시점이다.
집중의 중요성
단순히 팹을 짓고, 장비를 설치하는 것만으로 반도체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반도체 제조 시설을 국내로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 온갖 정책적 수단을 동원하고, 인텔과 같은 글로벌 강자가 ‘주 경기장’으로 돌아오기 위해 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아직 획기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소재, 부품, 장비가 원활하게 수급되고 소자 기업과 수백 개의 협력사가 상시 협력하는 유기적인 '제조 생태계'는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지배하는 메모리 중심의 산업 구조다. 제조 단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산업 클러스터의 ‘집중과 효율화’가 필수적인 환경인 것이다. 또한 반도체는 단 몇 달의 투자 지연이 곧 시장 주도권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 ‘적기 투자(Time-to-Market)’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업이다.
전 세계가 자국 산업에 대한 보조금과 파격적인 규제 인허가 속도전으로 경쟁력을 높이며, 그를 통해 우리나라를 압박하는 상황이다. 이럴 때 이미 검증된 인프라와 양질의 인력이 확보된 입지를 놔두고, 이를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는 주장은 국가 전략 산업의 미래를 건 위험한 선택이다. 당분간 용인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한 선택과 집중은 생존을 위한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팹을 짓고, 장비를 설치하는 것만으로 반도체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는 것은 아니다 // 사진=Unsplash
전력과 용수 문제,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용인 클러스터에 대한 우려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쟁점은 전력, 특히 친환경 에너지 수급과 용수 확보일 것이다. 10년 이후의 수요를 고려하면 용인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은 10~16GW로 예상된다. 당장 필요한 약 3GW 정도의 전력은 LNG 발전으로 대응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서 환경 오염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또 상당 부분의 전력은 송전망에 의존해 지방에서 끌어와야 하는데 주민이 그것을 수용할지 등을 고려하면서, 과연 가능하겠냐는 우려도 없지 않다.
이 부분은 기술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LNG 발전소가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보자. 발전소를 여기서 더 짓는 것에 대해 우려가 큰데, 따져 보면 수도권으로 전력을 공급하던 당진· 태안· 하동의 석탄 발전소를 LNG 발전소로 대체하는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탄소 배출량을 석탄 발전소의 45% 수준으로 낮추는 효과가 있다. 또한 수도권에 LNG 발전소를 지으면 송전선로 구축 부담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LNG 발전소를 짓는 것이 마냥 무리한 대안은 아니다. 참고로 서울 마포 한가운데에도 대규모 LNG 발전소가 자리 잡고 있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LNG 설비는 수소 혼소 발전(가스터빈에서 수소와 천연가스를 함께 태워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 수소 전소 발전(100% 수소로 발전하는 방식) 등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궁극적으로 무탄소 전원(CFE, Carbon Free Energy)으로 나아가기 위한 현실적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소형모듈원자로(SMR)와 같은 차세대 전력 기술의 상용화를 가속하는 방향으로 해법을 모색할 수도 있다. 이미 중국은 2026년 말 상용 SMR 가동이 가시권에 들어왔고, 미국 역시 ‘뉴스케일’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도 2030년대 초 상용화를 목표로 혁신형 소형원자로 (i-SMR)를 개발 중이다. 정부가 전력 수요 급증에 대비해 SMR을 포함한 차세대 원전 옵션을 제도적으로 열어둔 것이다.
이 발전소들을 2030년대 중반부터 경기 남부권에 배치할 수 있다면, 송전선로 확보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추면서 무탄소에 가까운 전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또 주민의 반대 때문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송전 문제는 서해안 초고압 직류송전 (HVDC) 등 기술적 발전을 통해 해법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가스공사 인천생산기지 LNG 저장탱크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이렇게 보면 용인 클러스터의 전력 문제는 사업을 멈춰야 할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미래 에너지 인프라 기술과 친환경 발전 기술의 개발을 가속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시급한 반도체 제조 기반 구축과, 미래 전력 수요 대응 기술 확보라는 목표를 동시에 만족하는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용수 역시 마찬가지다. 하수 재처리 등의 방법으로 2040년까지 용인 클러스터 수요(2040년 기준 약 76.4만 톤/일)의 두 배 가까운 146.9만 톤/일의 용수 확보 계획이 세워져 있다. 또한 반도체 업계에서도 반도체 팹에서 사용하는 용수의 재활용, 용수 저감 기술 등 신기술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용수 문제도 근본적인 제한 요인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산업은 기술의 압박이 클수록 더 빠르게 진화한다. 현재의 기술 수준만을 생각하며 10년, 20년 후의 문제를 예단해 국가 기간산업인 반도체 산업의 기반 구축을 지연시키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용인 클러스터를 미래 전력과 용수 기술의 실증 거점으로 삼는 방식이 훨씬 생산적이다.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이유로 전략 산업의 입지를 흔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제2의 ‘용인’ 아닌 제2의 ‘그르노블’
위에서 말했듯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고도로 집적된 산업생태계가 생명인 메모리와 최첨단 파운드리 제조에 집중되어 있다. 분산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반도체 클러스터 분산 주장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 전체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의 과실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프랑스 남부의 도시 ‘그르노블’이 좋은 사례다. 그르노블은 파리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나텍(MINATEC) 같은 세계적 연구소, 입자 가속기 등 거대 연구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지역 내 대학, 연구소, 기업이 연합해 운영하는 미나텍 연구소(MINATEC)는 연구원 3,000명, 학생 1,200명, 기업인 600명이 상주하고 있다. 거기에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SOITEC과 같은 반도체기업들이 어우러져 독보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밀집된 두뇌,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글로벌 강소기업,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연구, 생산 인프라, 강한 앵커 기업, 알프스가 보이는 우수한 정주 여건이 그르노블의 성공 요인이 되었다. 현재 그르노블은 반도체 패키징과 AI 반도체 분야에서 유럽 내 가장 핵심적인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르노블과 유사한 수준의 성공 요소를 어느 정도 갖춘 지역들이 없지 않다. 모든 지역마다 반도체 산업을 유치하겠다는 PIMFY (Please In My Front Yard) 현상을 극복하고 ‘가능한 지역’부터, 전략적 투자를 통해 지역 반도체 거점을 만들어 새로운 성장 기반으로 삼겠다고 생각하면, 지금과 사뭇 다른 발전 전략을 도출할 수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지금까지 메모리와 첨단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가 국가별 또는 진영별로 나뉘는 현 추세를 고려하면 생태계에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어 전력반도체, 통신 반도체, 우주 국방 반도체, 초고성능 센서도 유망한 분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런 분야들은 메모리와 같은 초고집적 생태계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따라서 지역을 이 부분을 담당하는 '다품종 고부가가치 기술 집적형 반도체 산업'의 요충지로 변모시키는 전략을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할 수 있다.
전국에 분산 설치되어 있는 반도체 연구인프라 시설도 연구용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확대 개편하고, 효율화하면 지방에서도 충분히 글로벌 강소기업이 탄생할 수 있다.
그르노블 시의 모습 // 사진=Unsplash
‘압도적’ 지방 정주 여건 제시해줘야
지역 반도체 전략에서 늘 제기되는 우려는 인재다. 지역에 인재가 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는 현상에 절반만을 보고 한 이야기다. 인재가 없어서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가 머물 수 있는 압도적인 환경을 먼저 제시하지 못한 것이 이유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포항공대가 성공적으로 지역에 정착할 수 있었던 비결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40년 전, 포항이라는 지방 도시가 세계적 연구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파격적인 정주 여건을 선제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 유치를 희망하는 지역이 글로벌 강소기업을 키워내고, 교육·의료·문화를 망라한 미래형 정주 여건을 제시할 수 있다면, 우수한 인재가 스스로 지방에 정착하며 혁신을 주도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정부는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글로벌 강소기업 창출 지원은 물론, 인재 육성과 고급 인력 지방 정주를 위한 특별 지원 등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획기적인 균형 발전 전략을 내놓아야 한다.
공존을 위한 실용적 투 트랙
결국 반도체 산업의 생존과 지역 균형 발전은 서로를 배척하는 대립의 가치가 아니다. ‘집중을 통한 초격차 사수’와 ‘전략적 분산을 통한 국가적 도약’은 선후(先後)를 다툴 문제가 아니라 함께 풀어내야 할 공존의 과제다.
우리 몸의 심장이 중심에서 강하게 박동하며 혈액을 공급하듯, 수도권의 반도체 클러스터는 반도체의 국제 경쟁력을 지탱하는 심장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 혁신의 에너지는 동맥을 타고 전국의 지역 거점으로 끊임없이 흘러가야 한다.
용인은 지키고 지방은 키워야 한다. 이미 수립된 용인 클러스터 계획은 SMR과 지능형 용수 순환 시스템 같은 혁신적인 자원 해법을 결합해 차질 없이 실행해야 한다. 동시에 정부는 제2, 제3의 그르노블을 만들기 위한 과감한 투자를 단행해야 한다. 지역 특화 반도체 거점 육성과 미래형 정주 여건 조성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 될 것이다.
기술의 진보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과 국가 정책이 강제해야 할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는 실용적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수도권과 지방이 각자의 전략적 역할을 맡아 하나의 유기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만이,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초격차를 지키고 국가 균형 발전의 백년대계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필자 이병훈은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학과장이다. 나노 융합 기술원 원장, 반도체 기술 융합센터(글로컬랩) 센터장을 겸임하면서 새로운 반도체 소재를 이용한 초저전력 반도체 기술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IBM, SEMATECH, SRC에서 차세대 로직 반도체 기술 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중장기 반도체 기술 개발 전략수립을 주도했다.
최근에는 반도체 인프라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지역혁신과 3+3집중 교육 프로그램과 같은 교육혁신에도 앞장서고 있다.